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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는 오스트리아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시인입니다. 기성 문학의 질서를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창작활동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 문학계에서 권위있는 문학상을 휩쓸었습니다.
희곡 관객모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페터 한트케의 생애
1942년 12월 6일 오스트리아의 케른텐주 그리펜에서 태어났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상 속에 태어나 알코올 중독에 따른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슬로베니아인 어머니의 언어적 문화적 이질성을 경험했으며 이는 그의 유년기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61년 그라츠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65년 첫 소설인 <말벌들>이 고무적인 반응을 얻자 학업을 중단하고 전업 작가로 나섰습니다. 그해 독일어권의 신예 작가 그룹인 47 그룹에 참여하여 기성 작가들과 문학관에 독설을 퍼부으면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1966년 발표한 희곡 <관객모독>은 첫 상연과 동시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별다른 서사 없이 배우들이 관객들의 관습적인 관람 형식을 고발하고 험담과 모욕을 내뱉는 게 전부인 이 작품은 잠시 논쟁의 중심에 섰으나 희곡의 기성 어법을 완전히 파괴한 혁신성을 인정받았고 이를 통해 페터 한트케는 단숨에 세계적인 극작가로 떠올랐습니다.
그의 주도 하에 47 그룹은 독일어 문학계에서 새로운 비평 질서의 중심에 섰으나 68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학생 저항 운동으로 구성원들의 정치적 견해가 대립하면서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회합이 끊어지며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고 1977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페터 한트케 또한 회의를 느끼고 그룹 해체 전부터 독자적인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관객모독>을 통해 보여준 논문적 성격은 이어서 발표한 희곡 <카스퍼>를 통해 더 심화시켰으며,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과 <소망 없는 불행> 등의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의 입지 또한 공고히 하였습니다.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여 1978년에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소설인 <왼손잡이 여인>을 영화화하였으며 1987년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시나리오 작가로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시에도 관심을 가져 1969년 시집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를 통해 시적 언어의 재구축을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파격성과 불가해성으로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지만 유럽 문학계는 수십 년간 그에게 매년 크고 작은 문학상을 수여함으로써 그의 치열한 언어 실험의 의의를 인정해주었습니다. 그의 실험은 47 그룹과 성향이 전혀 다른 61 그룹과 70 그룹, 빈 그룹, 그라츠 그룹 등의 다른 문인 그룹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페터 한트케 본인은 프란츠 카프카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카프카는 나의 글쓰기에 한 문장마다 척도가 되었다"는 말로 자신이 받은 영향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자아와 객관적인 외부 세계가 너무나 큰 긴장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도 표명했습니다.
페터 한트케의 작품 세계
일단 한트케의 가정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 슬로베니아인으로 언급된 한트케의 모친 마리아는 본래 슬로베니아 영토였으나 1920년 오스트리아로 넘어간 케른텐 태생으로 2차 대전때 케른텐에 주둔한 독일군 병사와의 불장난으로 아들을 잉태했습니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유부남이어서 마리아를 떠났고, 마리아는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품은 다른 병사 브루노 한트게와 원치않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원치 않는 결혼이라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마리아는 결혼 생활을 비관했습니다. 어릴때부터 슬로베니아어를 독일어와 함께 사용하며 자란 한트케는 성을 물려준 계부보다는 피가 이어진 어머니와의 유대감이 훨씬 강했습니다. 또 한트케의 이웃들은 마리아와 같은 슬로베니아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요인들이 작용해 한트케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지고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유고슬라비아인, 슬로베니아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에는 미묘한 반감을 드러낸 바 있으며 독일쪽에서도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꽤 있습니다. 그의 이런 성향들은 한국에도 번역된 자전적 소설 '반복'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의 어머니와 이웃들은 정치적으로 친세르비아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도 그런 정치관을 이어받았습니다. 2007년 베를린 앙상블에서 5만유로(약 7천만원) 가량의 성금이 들어오자 전액을 코소보의 세르비아 마을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을 정도로 세르비아와 통합된 유고에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성향은 논란을 낳기에 이르렀는데 유고 내전에서 인종청소를 저지른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 정부를 옹호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참여해 조사를 읽고, 비슷한 논조를 담은 글까지 썼습니다. 한트케의 수상은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안 주면 노벨문학상의 수치"라고까지 언급되던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피노체트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 하나로 끝까지 외면한 전례 등을 들어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한림원이 출신 따라 사람 차별(비유럽권 약세, 북유럽에 대한 은근한 우대)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거론되어 왔는데 그런 의혹에 한줄 더 얹었습니다. 이를 두고 유럽 난민 사태 이후 유럽에서 반이슬람 정서가 강해지면서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보스니아인들을 '인종청소' 명목으로 학살한 밀로세비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는 평도 나오고 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 생존자들이 항의 집회를 가지고도 하였으며, 노벨상을 시상식 앞두고 알바니아 · 보스니아 · 크로아티아 · 코소보 · 북마케도니아· 터키가 유고 내전 관련해서 외교사절 파견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코소보, 보스니아는 그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상식에서도 거의 소외받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수상 이후에도 만년 노벨상 후보인 알바니아의 대문호 이스마일 카다레에게 인터뷰를 통해 까였습니다.
2021년 5월에는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까지 수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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